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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 윈프리

by 러브앤럽 2024. 3. 25.

노력하는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녀의 성장과정과 전성기를 살펴보고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력 주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개요

오프라 게일 윈프리는 1954년 1월 29일 출생 오프라라고도 알려진 그녀는 미국의 토크쇼 진행자, 텔레비전 프로듀서, 배우, 작가, 사업가등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그녀는 1986년부터 2011까지 25년 동안 시카고에서 방송된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The oprah Winfrey Show)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미디어의 여왕으로 알려진 그녀는 20세기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으며 한때 세계유일의 흑인 억만장자였다. 2007년까지 그녀는 종종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윈프리는 미시시피 시골의 빈곤층에서 10대 미혼모 밑에서 태어나 나중에 밀워키 도심에서 자랐다. 그녀는 어린 시절과 10대 초반에 성추행을 당했으며 14세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아들은 조산을 하여 유아기에 사망하는 등 고난을 겪었다. 그 후 윈프리는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이발사였던 아버지 버논 윈프리와 함께 살게 되었고 고등학교 시절 라디오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19세에 그녀는 지역 저녁 뉴스의 공동 앵커가 되었고 윈프리는 감정적이며 순발력 있는 진행솜씨로 주간 토크쇼 무대로 옮겨졌고 3등급인 시카고 지역 토크쇼를 1위로 끌어올렸다. 그녀는 하포스튜디오를 설립하여 미디어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보다 감정적이고 친밀한 고백적인 형태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 윈프리는 Phil Donahue가 개척한 타블로이드 토크쇼 장르를 대중화하고 대 성공을 이루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윈프리는 문학, 자기 계발, 마음 챙김, 영성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쇼를 재창조하였다. 고백 문화를 대중화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자조 사상을 장려하고 감정중심의 접근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빈 판을 받기도 했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는 칭찬을 받았다. 윈프리는 또한 2008년 대선에서 정치적 세력으로 떠올랐으며 그녀가 버락 오바마를 지지한 것은 2008년 민주당예비선거다. 약 100만 표의 가치가 있다고 추정이 되고 같은 해에 그녀는 자신의 네트워크인 oprah winfrey network(Own) 결성하였다. 2013년에 윈프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자유메달을 받았다.

 

1994년에 그녀는 국립 여성 명예의 전당에 서게 되었다. 그녀는 여러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윈프리는 주간 에이비상18개 (평생 공로상 및 회장상 포함)와 경쟁적인 아카데미상 2개를 수상하게 되었고 , 2021년 미술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유년기 

오프라 게일 윈프리는 1954년 1월29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출생증명서에 룻기에 나오는 성경 인물의 이름을 따서

`오르파`라고 적혀있었지만 , 사람들은 그것을 계속 잘못 발음하여 `오프라`라고 불렀다.

그녀는 미시시피 주 코스티우스코에서 10대인 어머니 베르니타 리 와 아버지인 버논 윈프리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베르니타 리는 가정부였고 버논 윈프리는 석탄광부에서 이발사로 변신한 사람이었다. 윈프리는 태어난 후 어머니에게 버려져 외할머니 Hattie Mae Lee(1900년 4월 5일~1963년 2월 27일)|와 함께 시골에서 6년간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할머니는 너무 가난해서 윈프리를 종종 감자 자루로 만든 드레스를 만들어 입혔고 그 때문에 그녀는 놀림을 받아야만 했다. 그녀의 할머니는 세 살이 되기 저에 그녀에게 글자 읽는 법을 가르쳤고 지역교회에 데리고 다니면서 성경암송을 시켰다.

그 때문에 `설교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6살 때 윈프리는 어머니와 함께 위스콘신 주 밀워키의 도심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가정부로 일하면서 윈프리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지 못했다.

청소년기

상처를 잊기 위해 오프라는 독서와 공부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14세에 명문사립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프라는 학교에서 자신만 유일한 흑인이라는 사실과 부유한 가정의 백인친구들을 보며 극심한 열등감과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그 와중에 집에 드나드는 사촌 오빠와 삼촌의 성폭행이 계속되어 견디다 못한 그녀는 가출을 하여  집 밖을 배외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프라는 원치 않는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반항아로 변해버린 오프라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오프라를 다시 내슈빌에서 이발소를 하고 있는 아버지 집으로 보냈다. 새어머니와 재혼한 상태였던 아버지는 오프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왔으나 1968년 아이는 태어난 지 2주 만에 세상을 떠났고 오프라는 자신의 기구한 삶과 죄책감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마약과 담배를 의지하며 답답한 현실을 잊고자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격려와 지지로 절망을 이겨내고 동네 인근 고등학교를 다시 다니며 전교회장에 당선이 되었고 점점 자신감을 회복하고 다시금 꿈과 희망을 되찾게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개최한 여러 말하기 대회, 콘테스트에 참가하며 점점 유명해졌으며 19세가 되는 해에 라디오 프로 진행자로 취직을 했다. 이를 계기로 방송인으로 데뷔를 시작한 오프라는 어느 지역의 저녁뉴스 공동 앵커일을 시작했지만 뉴스에 감정이 담긴 전달을 했다는 이유로 8개월 만에 해고되었다. 당시 이 사실이 방송국 내부로 퍼지면서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고 이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가운데 남자 친구와도 헤어지면서 폭식으로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바람에 체중이 110kg에 육박할 정도로 살이 쪄서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전성기

그러나 1983년 오프라는 시카고에서 시청률이 낮은 30분짜리 토크쇼인 에이엠 시카고 방송의 진행자가 되어 한 달 만에 같은 시간대 시청률 1위로 성공을 시켰다. 그리고 1986년에는 이 프로그램의 이름이 `오프라 윈프리 쇼`로 바뀌게 되었고 미국 전역에 동시 방송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당대 미국의 최고의  인기 토크쇼인 `필 도나우쇼`의 시청률을 따라잡게 되었다. 1988년에는 영화제작 스튜디오, 잡지 발행사 및 쵤영장을 두루 갖춘 3헥타르 규모의 개인 스튜디오를 설립하여 미디어 사업가로서 큰 성공을 이루었다.

 

오프라의 토크쇼는 사회문제부터 연예계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고 2011 종영 전까지 3만 명이 넘는 기자들이 나왔으며, 운동선수, 연예인, 정치인, 종교인. 예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나오며 세계적으로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25년간 총 5.000회 방송, 미국 내 시청자수 2,200만 명, 전 세계 140개국 방영, 일일 시청자 수 700만 명이라는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그녀의 진솔한 인터뷰 스타일과 공감능력은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단순한 텔레비전 연예인을 넘어선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낸 진정한 리더이다. 그녀의 열정과 인내, 그리고 사회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노력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고 그녀의 영향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